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실상 마음과 몸, 두뇌가 함께 결합되어 있고, 앞으로 백만 년이나 지나면 모를까 각각의 칸막이 속에 격리 수용된 것이 아니기에,

훌륭한 저녁 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지요. 저녁 식사를 잘 하지 못하면서 사색을 잘할 수 없고 사랑도 잘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쨍그랑.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히로사와의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빈자리를 치우던 웨이트리스가 바닥에 유리잔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볼품없는 남자 둘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해 부러 유리잔을 떨어뜨려존 것인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보았다.

'히로사와 요시키는 살해당했다.'

그렇게 썼다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선을 북북 그었다. 전부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오로지 집에 찾아가는 게 목적이라고 하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살까봐 거짓말을 했지만,

이런 거짓말이 쌓여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호흡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자신을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도 있었다. 이것은 아무 예고 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여기로 갈무리되도록 짜여 있었던 것이다.

별안간 굵은 덩굴의 뿌리가 뚝 끊겼다.

압박감에서 해방되었다. 불안을 잘라낸 것은 불쾌감이었다. 비오는 날, 누군가 흙발로 다다미방에 들어온 듯한 불쾌감.

후카세가 원두 종류를 맞혔을 때, 그를 흘깃 쳐다보는 미호코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단하시네요, 라거나 어떤 맛인데요? 하고 묻지는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마음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얼굴이 왠지 좋아, 후카세 쪽에서 그녀를 흘깃거리기만 했다.

커피에 꽃이나 과일 풍미가 난다니 무슨 뜻일까?

점원에게 물어보면 그만이겠지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모르면 묻고,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할 수 있었다면 후카세는 저금 더 편히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각만큼은 조금 있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러시아 정교회에는 '성스로운 바보'라는 개념이 있다. 세상을 향해서는 바보이지만 신을 향해서는 현명한 사람을 의미한다. 내 짐작에는 테드는 아기를 본 순간부터 자기가 아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아기를 안은 채 한참을 생각하며 앉았다. 그때 그는 자신과 아기의 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인지 의심하는 순간 그것은 아기에게 수치를 뜻하고, 아기의 미래가 온통 위태로워질 것을 알아차렸다. 어저면 아기를 안는 순간 그는 한 치의 의심이라도 지금 자신이 누리는 이 모든 행복을 뒤흔들 걸 깨달았을 것이다. 위니처럼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영혼이 자신에게서 성적으로 흥분하고 만족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위니는 테드를 좋아했지만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위니를 미치도록 흥분시키는 사람은 아니었다.

도리스가 아기와 함께한 오후 한나절은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깜박 잠이들고, 아기를 어르고, 뽀뽀하고, 아기와 엄마 사이에 깰 수 없는 유대감을 쌓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아기의 타고난 권리이다. 어쩌면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서 짧은 몇 시간 동안이라도 사랑을 듬뿍 주려고 애썼을 것이다.

우리가 앞날에 대해 미리 예견할 수 있다면 살면서 잘못될 일은 없을까?

프레드는 메추라기와 토피 사과 사업이 강제로 폐쇄 당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지미!"

나는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지미의 연한 파란색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우리 둘 사이는 어릴 적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뛰놀던 수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뒤에 서서 파티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종이 모자를 쓴 채 연신 딸국질을 해대는 가슴이 풍만한 아주머니들과 홍안이 되어 따을 흘리는 아저씨들 한가운데 있는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저 얼른 혼자가 되고 싶었다.

들어갈 땐 맨 꼭대기로 들어가야 해요.

바닥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겠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랬다간 더 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죠.

수녀님이 눈에 웃음을 띠고 나를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지요."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일했던 병원의 딱딱하고 경직된 시스템과 달리 친절하고 융통성이 많은 수녀님들에게 감명 받았다.

너무나 비극적이다.

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사실 아마어마하게 많다. 어떻게 이 상냥하고 예쁜 여자는 그런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궁핍한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혹시 모두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없어서?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면, 나도 메리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을까? 내 생각은 늘 그렇듯이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향했다.

메리는 마음이 좀 놓였는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그녀를 위해 사과파이와 아이스크림을 더 주문했다. 이런저러한 메리의 상황이 천천히 드러났다. 나는 경쾌한 음악처럼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매혹되었다. 그녀가 오래된 연민을 자아내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밤새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가렛은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그 조용한 남자의 내면에 있는 진실함과 영혼의 강인함과 아직 손닿지 않은 곳에 있는 감각의 깊이를 보았을 것이다.

일 년쯤 뒤 방문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 젠킨스 부인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 기회가 생겼다.

그때 난 겸손이라는 미덕도 함께 배울 수 있었다.

인간과 기대 수명이 비슷한, 70년 정도 사는 다른 동물과 비교하자면 인간의 임신기간은 2년쯤 되어야 한다.

하지만 두 살쯤이면 인간의 머리는 어떤 여자도 분만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커져버린다. 그래서 인간의 아기들은 완전히 무력하고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녀에게는 인생의 매 순간이 도전이었으며 성공적으로 이겨낼 때마다 크게 기뻐했다.

브렌다는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예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자격이 충분한 여자였다.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겨 자전거를 탔다.

그녀 자신의 환경에서 릴은 구역질 나는 불쾌한 여자가 아니라 영웅이었다. 릴은 지독히 나쁜 상황에서도 가족과 함께 있고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릴은 환기가 넘치고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매독에 걸리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치료하러 그곳에 갔지 판단하러 간 건 아니었다.

릴은 자기 집에서는 달라 보였다.

아마도 진료실은 릴에게 다소 두려운 장소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오히려 으스대면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해야 한다고 느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