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저 멀리 보이는 비행기들을 보며 이리저리 뛰노는 도현이.

의미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도현이와 정민형, 하준이가 있어 그 자체로 즐거웠던 시간들.

지금 미야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돈도 없고, 믿음이나 우정도 없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후회도 없었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에 온 것처럼 정신 사나웠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자아를 잃어 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고지는 연인은커녕 남자친구도 아니다. 그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을 뿐인 사이다. 그런데 동창이라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연인보다 자신의 대해 잘 알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둘 다 어린아이였을 때 만나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고,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았다. 그것만으로 어딘가 평생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남긴 것이다. 그게 좋은 추억에 의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 말처럼 직급이 오르고 보수가 나아지고 그러다 보면 조장이나 팀장처럼 이곳에서 다 늙어 버릴 게 분명하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이 커다란 창고를 빙빙 돌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얶다. 어쨌든 더 나은 일을 구해야 했다.

조회가 끝나면 매일 다 같이 하는 거였다.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은 어비와 나, 둘뿐이었다.

파스타 한 그릇 정도는 머리 대신 손만 갖고도 만들 수 있을 때 얻는 것은 맛있는 한 끼 식사뿐 아니라 견고한 일상의 리듬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은 기계이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은 강력한 무기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들은 개인의 사적 경험과 지리적 공간이 만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일 터다.

그러나 장소의 의미는 좌표값으로 환산되고, 위치는 곧 계급으로 수직화된다. 좌표 값에 포박된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곤 박탈감과 무력감 그리고 '고향'과 '생활'을 가지고픈 동경일 뿐. 삶이 점차 희박해져가는 이 도시를 영화가 사랑할 수 없음은 어쩌면 자명한 일이다.

세입자인 나는 결국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이웃을 만들지 않을 것 같다.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동네에 섞이지 못하는 대신 출퇴근길에 냉소적인 척 결국 음흉한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관음)할 것이다.

서울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구성원일까?

출산률 상승에 기여할 생각이 전혀 없는 40대 독거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분리수거 개상이 됐을지 모른다. 물론 나 역시 이 도시에서 트집 잡고 싶은 구석이 한 다스쯤은 된다.

미야는 택시 유리창을 향해 한숨을 토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정점이었어. 그 뒤로는 끝없는 추락이 기다렸지.

게이코는 가벼운 실망감으로 유타카의 옆얼굴을 보았다.

여드름은 싹 사라지고 꽤 멋진 남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튜어디스와 만나 보고 싶다는 둥 철 지난 농담을 한다는 부분에서 살짝 환멸을 느꼈다.

화장실이 연달아 붙어 있는 하버드 기숙사에 사느니 화장실이 세 블록 멀리 떨어져 있는 샤르트르 성당에서 잠을 자겠다.

위대한 건축은 실용성을 우선시하는가? 존슨의 이러한 말은 무책임한 것이면서도 그 의미는 새겨볼 가치가 있다. 편리함은 어디에나 있고 대체 가능하지만 위대한 건축의 경험은 드물고 귀한 것이다.

고마웠어요.

잘 자요. 립반윙클 님.

나니미는 그녀들의 세계에 압도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이 마시로가 살던 세계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 있어서는 안 될 세계. 만일 그렇다고 해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면 안 되는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인정받지 못해도 그녀들이 살아가는 힘에는 굉장한 무언가가 있었다. 마시로가 그랬다. 살아가는 에너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인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 나나미,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부서져 버릴 것 같아.

아무로는 멋쩍어 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부터가 참모습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진실과 거짓, 또 그 경계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독선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두서없는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나미는 어딘지 이 직장의 일원이 된 듯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소소한 행복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치 립반윙클과 같은 하루였다.

낯선 결혼식에 참석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잔을 나웠다.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가슴속에 아름답게 새길 수 있기에

언제나 언제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내일을 맞이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신부는 시종일관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나나미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에게 과연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불행도 겹쳐져서 나나미는 이 신부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면 이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을 보디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세요.

그냥 웃어 주세요.

나나미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는 생명력이 예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남들의 시선을 끄는 사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와 반대로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나미는 자신은 확실히 후자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글자를 입력했지만 막상 송신하려니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나나미는 애써 쓴 글을 삭제했다. 최근 들어 이런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남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누군가가 내 글을 보는 것도 성가시다. 글을 올리지 않아도 글자를 입력하고 싶은 만큼 입력하는 것만으로 울분이 가실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