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바로 그곳이 있었다.

흐릿한 안개를 뚫고 엄청난 크기로 우뚝 솟아 있는 곳, 창문은 모두 새까맣고 굳게 닫혀 있고 굴뚝에서는 회색 연기 같은 것이 희미하게 흩날리는 곳, 모드 릴리가 있는 저택이자 이제부터 내가 우리 집이라 불러야 할 곳, 바로 브라이어였다.

그 여자는 나를 몰랐다.

나도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 여자를 몰랐다. 그 여자는 데인티 워런과 존 브룸이 우리 집 부엌에서 폴카를 추는 동안 내가 이곳에 서서 자신을 망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을 몰랐다.

내 생각해서 일찍 일찍 좀 다녀주라.

사랑은 바라지도 않는다. 나 심심하다 진짜.

젠틀먼은 생각에 잠기며 망설였다.

당연히, 쇼였다. 잠시뒤, 젠틀먼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쪽팔리지 않습니다.

더 사랑하는 게 쪽팔린 것은 아닙니다.

별일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을 거란 말보다, 나랑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백배 천배 위로가 된다.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다.

갑자기 이런 소설 작법서에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허구에 관해 계속 몰두하다보니 글을 쓰고 있는 현실의 나조차도 조금은 허구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서입니다. 

숲속으로 낮이 사라지고 있다.

그늘이 넓어지고 대기가 희뿌옇게 변했다. 한여름 늦은 오후가 이렇게 어두워질 수도 있나. 구름도 바람도 없는데, 태양은 저리도 맹렬한데 왜 숲은 어둡나.

선릉역에 선릉이 있다니.

선릉이 있으니까 선릉역도 있는 것이겠지만 나는 이 사실이 낯설었다. 도시의 비밀 하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실업과 빈곤,

과도한 노동과 끝없는 경쟁은 이 세계가 청년들의 생기를 빨아먹으며 지속된다는 표시다.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본 적 없잖아?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야기를 무시하고 문장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연령, 성별, 가족 구성이나 사회적 입장에서 전부 다른 사람들이 '이것은 내 이야기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의 힘입니다.

물론 그것만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재미의 전부는 아니지만요.

모두 같은 감상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교훈, 같은 가치관을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을 열심히 읽은 결과 모두 다른 목적지에 도착한다 해도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놀라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풀베게>는 한 장의 그림처럼 다양한 부분을 모아 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에 주목할 수도 있고, 뚜렷하지 않더라도 전체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을 즐기는 데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자신이 좋을 대로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할 일이 아니지요.

토니는 그녀가 꾸던 꿈의 일부인 것 같았다.

얼마 전 큰 자극을 받고 깨어난 꿈, 그리고 깨어 있는 지금 이 시간에, 한때 너무도 견고했던 그의 존재에는 어떤 실체나 형체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낮과 밤 매 순간의 끝자락에 드리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토니, 짐, 어머니, 이 세 사람 모두 그녀가 상처만 입히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빛과 명쾌함으로 둘러싸인 순수한 사람들이고, 그들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어둡고 불분명한 그녀 자신이므로.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구석구석 생생한 것들로 꽉 찬 듯했던,

너무도 견고하게만 보이던 것을 되찾으려는 사람처럼, 아일리시는 그 모든 것을 찬찬히 되새겨 보았다.

그건 분명 편지 쓰기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 쓴 글이었다.

그렇지만 토니는 거기에 자기만의 어떤 것, 따스함, 친절, 세상에 대한 열정을 덧입히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에게 깃든 어떤 것이, 그 편지에도 배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떠나 버릴까 하는 조바심 같은 것이.

아일리시를 울게 한 것은 신부의 목소리에 배인 부드러움,

그녀의 눈을 피하는 신부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리고 이런 일에 대비해 신부가 주머니 속에 준비해둔 게 분명한 크고 깨끗한 흰 손수건을 내밀자 아일리시는 그를 밀치면서 거의 히스테리에 가깝게 흥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