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주민의 한 사람으로 일상생활을 보내던 곳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여행자로 다시 방문하는 기분은 제법 나쁘지 않다.

그곳에는 당신의 몇 년 치 인생이 고스란히 잘려나와 보존되어 있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 찍힌 한 줄기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나는 어둠에 몸을 내맡겨 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을 들어 밝은 빛을 마주하도록 요구받을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아무도 말이 없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리처드만이 노를 젓는다. 우리는 침묵 속에 부드럽게 물 위를 미끄러져 각자의 어두운 지옥을 향해 나아간다.

문에 도착하자 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열쇠와 빗장에 기름칠을 해서 돌린다.

수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남자아이처럼 눈을 찡긋한다. 가슴속 깊이 심장이 아려온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신은 알게 된다.

결국은 사랑 때문에, 경멸도, 악의도 아닌, 단지 사랑 때문에 내가 결국은 수를 상처 입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수가 내 옷을 벗겨 주러 오면 나는 차분하게 수의 손길을 견뎌 내겠다고 결심한다.

밀랍 마네킹이 재단사의 재빠르고 무관심한 손길을 견디어 내듯이 말이다. 하지만 밀랍 팔다리라도 결국은 자신을 올리고 내리는 손의 열기에 져 녹아내릴 게 분명하다. 결국은, 내가 수에게 지는 밤이 온다.

나는 내가 누워 있는 집에 대해 생각한다.

침대가 있는 방에 대해 생각한다. 방의 모서리와 벽면을 생각한다. 저것들을 만지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한다. 나는 일어나고, 춥지만, 조용히 여기저기로 걸어 다닌다. 벽난로 선반, 화장대, 양탄자, 옷장을 만지고 다닌다. 그리고 수에게 돌아온다. 수가 거기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수를 만지고 싶다. 감히 그러지 못한다. 그러나 수를 떠날 수 없다. 나는 손을 들어 1인치씩, 딱 1인치씩만 수의 위로 움직여 간다. 수가 자는 동안 엉덩이, 가슴, 구부린 손, 베개 위에 놓인 머리, 얼굴 위로 손을 움직여 간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간다.

그리고 내가 동정이라 여기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버겁고, 고통스럽고, 놀랍다. 그걸 느끼고 두려워진다. 나의 미래에 내가 치러야 할 것들이 두려워진다. 미래 그 자체가, 그리고 나의 미래를 채울 낯설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이 두려워진다.

리처드가 오고 있고, 나는 아직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시간이, 날들이, 어둡고 음흉한 시간의 물고기들이 손 사이로 주르륵 흘러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금속이 갈리는 느낌, 내 턱을 잡고 있는 수의 악력, 부드러운 숨결.

수가 이를 갈며 내 입안을 자세히 보고 있는 동안, 오로지 수의 얼굴만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수의 눈을 바라본다. 이제야 한쪽 눈에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좀 더 어두운 갈색 점이 박혀 있음을 안다. 뺨 선을 본다. 부드럽다. 귀를 본다. 단정하게 생겼고, 둥근 귀고리며 팬던트를 달기 위해 귓볼을 뚫었다.


나는 잠시 동안 다시 캄캄한 혼란 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리고 꿈이 갑자기 내게서 미끄러져 나가고 나는 수를, 그리고 나 자신을 자각한다. 내 과거, 현재,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자각한다. 수는 내게 낯선 사람이지만 내 모든 시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삼촌에게는 오직 자기 책이 전부야!

삼촌은 나를 책처럼 만들어 버렸어. 누구도 고르거나 집거나 좋아해선 안 되는 책이 되어버렸어. 나는 어두침침한 이곳에 영원히 박혀 있을 운명이라고!

나는 정말 하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진심으로 자기 주인을 걱정하는 하녀 말이다.

젠틀먼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빨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담배연기가 찬 공기를 파랗게 물들였다. 젠틀먼이 말했다. "이제 모드는 우리 거야."

손 피부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다른 곳 피부와 마찬가지로 지나치다 싶게 부드러워서, 볼 때마다 피부에 멍이나 상처를 낼 만한 날카롭거나 거친 물건이 꼭 함께 떠올랐다.

모드는 어린애에 가까웠다.

여전히 약간 떨고 있었고,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이 깃털처럼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떨림이 멈추자, 속눈썹이 다시 한 번 내 목을 스쳤고 그리고 잠잠해졌다. 모드는 무거워지고 따뜻해졌다. '착하기도 해라.' 모드가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내가 말했다.

도둑에게도 약점은 있는 법이다.

그림자가 계속해 일렁이며 춤을 췄다. 밀가루 반죽같은 시트는 여전히 차가웠다. 커다란 시계가 열 시 반, 열한 시, 열한 시 반, 열두 시를 쳤다. 나는 누워서 떨며 석스비 부인과 랜트 스트리트, 집을 진심으로 그리워 했다.

다시 사랑해야만 하니까.

“나는 쪽팔리지 않습니다. 더 사랑하는 게 쪽팔린 것은 아닙니다”라고 되뇌는 여자가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면, 그 누가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제안 능력’이 있어야 한다.

플랫폼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선택하는 장소’일 뿐, 플랫폼에서 실제로 선택을 수행하는 사람은 고객이다. 그렇다면, 플랫폼 다음으로 고객이 인정해 줄 만한 것은 ‘선택하는 기술’이 아닐까.

기획의 유효성은 무엇으로 측정하는 것일까?

아무리 세련된 디자인을 지닌 유리잔이라고 해도 결국 ‘액체를 담는다.’라는 매우 단순한 기능을 지닌 물건이듯, 기획에 관한 이런 질문과 해답 역시 본질적으로는 매우 단순하다. 기획의 가치란 ‘그 기획이 고객 가치를 높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상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기능, 또하나는 디자인이다.

부가 가치는 간단히 말하면 ‘덤’이다.

거기에는 상품의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그에 첨가된 가치라는 뉘앙스가 내포돼있다. 하지만 이제 상품의 디자인은 결코 덤에 비유할 수 없는 요소로서 본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본질적 가치다.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유는 그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간단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금전 쪽으로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것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그곳에서 탄생하는 기획은 형해화하고 생명력을 잃는다.

현장, 즉 고객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에서, 고객의 입장에 서서 정말로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힘 있는 기획을 만들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