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엔느 수녀님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것은 언변이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떠한 강요나 명령도 하지 않고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특별히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주변은 늘 환히 빛났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줄리엔느 수녀님의 광채가 속세의 가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적인 차원의 에너지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그때는 소설이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내 몸은 말을 찾아서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거기까지 내 몸을 '끌고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애들이 자기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돈과 안정만 좇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의미였다. 나는 나의 꿈을 따라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같다.

우리 셋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안방에서 함께 잤다.

불을 끄고 천장을 보면서 하던 이야기들. 그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말들도 용기를 내서 주고받았다. 마치 처음 사귀는 사람들처럼.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사람들처럼.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나뿐인 이단 우산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펴지는 우산이었지만 버튼도 들지 않았고 수동으로 펴지지도 않았다. 비는 굵은 방울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날씨에 우산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않은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골목 끝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우산을 살 만한 돈이 없었다.

점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오만이 그 사람들을 얼마나 쓸쓸하게 했을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얼음은 녹아 금방 없어지는 것이라.

나는 늘 아름다운 한때를 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의 꿈. 그것은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린아이도 나이 지긋한 어른도 다들 신기해하는, 이내 사라지는 비눗방울 같은 한때였다.
그 느낌을 정말 좋아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살아 있는 것은 똑바로 이쪽을 쳐다본다.

동그란 눈과 확실하게 눈이 마주친다. 서로를 들여다볼 때, 거기에는 두 개의 영혼이 있다. 그쪽과 이쪽이 한순간 하나의 창문이 된다. 이렇게 다른 곳에 살고 있는데, 크기도 전혀 다르고, 상대의 세계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는데, 서로 쳐다보고 인정한다. 어떤 섭리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엄마가 구워 놓은 빵이나 어젯밤 먹고 남은 밥을 조금 먹으면서 우리는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하지메는 갈색 설탕을 듬뿍 넣고, 나는 우유만 넣어서.
이렇다 할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런 것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바다의 뚜껑."

"제목이 이상히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계속 잠을 못 잤는데, 이 곡만 유달리 귀에 익어서 자장가가되고 말았어. 지금도 들으면 차분해지니까, 혹시나 싶을 때를 위해 가져왔어. 바다의 노래라서, 실제로 해변에서 들어 보는 게 이 여름에 내가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이야."

그렇게 조그만 몸으로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는 하지메의 모습은, 언제나 몸 하나는 튼튼해서 여기저기 상처를 내면서도 이 동네에서 뛰놀며 자란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섬세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메는 피가 머리로 쏠린 것처럼 머리가 유난히 무거워 보이고, 다리는 가녀려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서울로 갈 짐을 들고 열여덟의 그녀가 옥수수밭을 부러 가로질러 시외버스를 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한 세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러진 옷수숫대들이 황폐한 밭에 무더기로 쌓여 있던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무슨 일을 주기적으로 하는 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급식시간에는 늘 선글라스를 낀다. 수업시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엎드렸다 일어났다 한다. 엄마도 주기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지금보다는 덜 중요했을 텐데. 수입은 일정한 주기로 들어와야 한다. 부모는 일정 시간에 집에 머물러야 한다. 삶에는 파도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 밀려 나가야 한다.

가여운 세실리아.

그 마음 내가 전문이지. 밤은 오고 잠은 가고 곁에는 침묵뿐이고 머릿속은 시끄럽고 그러면서도 뭐 또렷하게 어떤 생각은 또 할 수 없어서 그냥 나 자신이 깡통처럼 텅 빈 채 살랑바람에도 요란하게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 나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손은 아주 차가웠고 웬만한 남자 손만큼 컸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중균씨는 부끄러웠다.

"무료 아닙니다. 안 먹는다고 하면 돌려줍니다. 구만, 육천원"

조중균씨는 말 중간에 쉼표를 넣어 이상하게 끄는 버릇이 있었다.

내일 봐요, 하고 내가 사무실을 나가면 조중균씨는 일어나 자기 자리만 남기고 사무실 형광등을 모두 껐다.

그리고 그런 사무실의 어둠을 아주 따뜻한 담요처럼 덮고 원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감방 벽 높이 달린 작은 창문을 통해 햇빛 두세 줄기가 스며들었다.

우리는 햇빛이 바닥의 판석을 기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빛이 저렇게 기어갈 수 있다는 것을 예전엔 전혀 몰랐다. 햇빛은 손가락처럼 기어갔다.

머릿속이 연기로 꽉 찬 듯한 혹은 머릿속에 커튼이 펄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버러의 거리를 다녀 보려 하였으나 길을 잃고 말았다. 병원의 누구도 그 거리를 아는 이가 없었다.

잠이 들었다 말았다 하는 바람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밤이 흘러가는 것 같다.

몇 년어치의 밤이 흘러가는 것 같다! 마치 흩날리는 연기 속에 있는 것처럼,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비틀거리며 밤을 헤치고 나아간다. 이제 나는 브라이어의 화장방에 있다고 믿으며 깨어난다. 크림 부인 집의 내 방에서 깨어난다. 정신 병원 침대에서 몸집이 거대하고 편안한 느낌의 간호사를 옆에 두고 깨어난다. 결국은 내가 정말로 있는 곳은 어디인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내가 누구이고 어떤 이인지 통렬하고 소름끼치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오로라는 이윽고 말이 꼬여서 의미를 잃어가듯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는 따뜻한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었다.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