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또 가을이 왔다.

바람 냄새나 햇빛 색깔이나 길섶에 핀 작은 들꽃이나 조그만 소리의 울림이 나에게 가을 소식을 전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기즈키는 열입곱인 채로, 나오코는 스물하나인 채로. 영원히.

그러니 그 누구의 눈길도 의식하지 말고, 이러면 행복해질 것 같다 싶으면 그 기회를 잡고 행복해져요.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 번 아니면 세 번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요.

그러나 그것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어떤 종류의 책임이란 것만은 알아.

나는 그 책임을 내팽개 칠 수 없어.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설령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오이를 아작아작 씹노라니 세상을 떠난 미도리 아버지가 떠올랐다.

미도리를 잃고 내 생활이 이렇게나 아무 맛이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니 슬픈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점점 부풀어 오른 것이다.

나오코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나는 멋지고 기분 좋고 아름다운 것만 가려서 썼다.

풀냄새, 신선한 봄바람, 달빛, 영화, 좋아하는 노래, 감명 받은 책 같은 것에 대해 썼다. 그 편지를 다시 읽어 보고 스스로 위로 받았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에 사는가를 생각했다.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감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 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이라고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 작은 세계에서 멀어질수록 그날 밤의 일이 진짜로 있었던 건지 아닌지 점점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던 것 같고, 환상이라 생각하면 환상인 듯했다.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세부까지 생생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오코의 몸도 달빛도.

"아마도 아직은 이 세상이 낯설어서 그럴 거야."

나는 조금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여기가 진짜 세계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사람들도 주변 풍경도 왠지 진짜가 아닌 것 같아 보여."

나는 몇 번씩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의미 없이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중력이 다른 행성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래, 이게 바로 바깥 세계인 거야, 하는 생각과 함께 슬픔이 밀려왔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더 심각하게 아프고, 뿌리도 아주 깊어. 그러니까 만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너 혼자라도 가줘.

우리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어.

만일 기즈키가 살았더라면 우린 아마도 같이 지내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고 조금씩 불행해졌을 거라고 생각해.

식당 분위기는 툭수한 공구의 견본 시장과 비슷했다.

한정된 분야에 강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한정된 장소에 모여 저희들만 아는 정보를 교환하는.

나오코가 가 버리고 나는 소파 위에서 잠을 잤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나오코의 존재감 속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부엌에는 나오코가 사용하는 그릇이 있고 욕실에는 나오코가 사용하는 칫솔이 있고 침실에는 나오코가 잠드는 침대가 있다. 나는 그 방 안에서 세포 구석구석 피로의 한 방울까지 짜내듯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방황하는 나비 꿈을 꾸었다.

나는 나오코가 보낸 편지지 일곱 장을 손에 든 채 망연히 생각에 몸을 내맡겼다.

처음 몇 줄은 읽은 것만으로도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스윽 그 색이 바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눈을 감고 오랜 시간을 들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설마 무슨 이상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죠?"

"물론 없지. 인생에는 그런 거 필요 없어. 필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행동규범이야."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그 때문에 우리는 아주 먼 길을 돌아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삐둘어지고 말았어.

그녀가 갈구하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팔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온기이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뭔지 모를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