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리시는 다시 매장으로 돌아가 방금 일어난 일을 멈추거나 신부가 말을 못 하게 막을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플러드 신부에게 여기서 나가라고, 다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말할 뻔했으나,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여기 있었다. 그녀는 신부가 한 말을 이미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플러드 신부에게 여기서 나가라고, 다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말할 뻔했으나,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여기 있었다. 그녀는 신부가 한 말을 이미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일리시는 이런 행동, 대관람차를 타지 못하게 말리는 편안하고 태연한 그의 태도, 예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그 귀여운 이중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에게도 비밀이 있고 조용히 그 비밀을 지키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까지 했다.
그 뿐이야. 누구나 그 병에 걸리지. 하지만 빨리 지나간단다. 어떤 사람의 경우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지나가지. 그 병보다 힘든 건 없어. 해법은 마음을 털어 놓을 사람을 만드는 것, 그리고 바삐 지내는 거란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그런 때 느끼는 충실감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건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기분입니다.
소재는 당신 주위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눈길을 받고 당신의 손에 잡혀 이용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 습관은 많은 경우 젊은 시절에 몸에 바는 것인데-그리 쉽사리 독서를 내던지지 못합니다. 가까이에 유튜브가 있건 3D 비디오게임이 있건, 틈만 나면(혹은 틈이 나지 않더라도) 자진해서 책을 손에 듭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벌써부터 자기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이 방을, 언니를, 이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미국행이 암묵적으로 예정되었음을 아일리시는 깨달았다.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그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그의 삶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졌지만, 만약 다시 한 번 출발점으로 돌아가 천천히 모든 것을 다시 음미할 수만 있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 말로 지난 삼 년의 세월을 말끔히 지워 버리고 나면 그들은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적응한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슬픈 일이다.
말하자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를 악물고 긴장한 상태로 기다려 왔던 것이다. 이제 그 반작용으로 너무 많이 감아 놓은 시계처럼 태엽이 풀리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보이는 반응 정도에 따라 자기 집의 모든 것을 재평가하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녀가 실제 눈앞에 있는 이상 다른 그 무엇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는 이따금씩 자신의 소유물들을 멍한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체크인할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다른 투숙객들이 일제히 모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덕목이 있다. 즉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정직한 사람 중 하나이다.
활기에 넘치고 모험으로 가득한 분위기와 끊임없이 명멸하는 남녀와 자동차들이 들떠 있는 눈동자에 안겨 주는 만족감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고백을 하면서 사용하는 표현이란 흔히 남의 말을 표절한 경우가 많고, 그것을 억지로 숨기려고 하다 보니 대개 흠이 나 있게 마련이다. 판단을 유보하면 무한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미세한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동물의 세계에선 포식자가 아니라 주로 잡아먹히는 초식동물의 몫이잖아요. 인간의 세계에선 '을'들이 그러죠.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