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뒤쫓던 오사무는 멈춰 서서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의 거대함을 깨닫고 목 놓아 울었다. 오사무는 이제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해한 순간,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눈물은 좀체 그치지 않았다.
노부요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위를 쳐다보았다.

미야베는 노부요처럼 죄의식이 낮은 범죄자가 특히 더 싫었다.

노부요도 싫었다. 정의를 내세우며 단죄하고, 사람의 도리를 있는 그대로 설파하는 미야베 같은 인간은.

노부요는 일을 포기하고 이런 시간을 선택한 것이었다.

시시하고 바보 같은 사건이다. 쇼타와 린이 어른이 되면 오늘 일을 말해줘야지. 그리고 넷이서 신나게 웃어야지.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거야.
노부요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가족을 빼앗긴 것처럼 이 가족에게도 누군가를 빼앗기는 불행을 맛보게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아키의 얼굴에 자신이 한때 사랑한 남자의 모습을 느낀 것일까.

이 감정은 증오일까 사랑일까. 하쓰에는 알 수 없었다.

노부요는 깔끔하게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자신에게 놀랐다.

어째서일까. 그렇다.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린과의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노부요는 뭐든 할 작정이었다.

평일 대낮에 테니스라니.

팔자 좋은 사람들 같으니. 노부요는 자신과 너무 다른 상황에 어쩐지 화가 났다. 왜 나는 항상 가난에 허덕이는 쪽일까. 왜 내 앞은 늘 내리막 길일까. 그저 운이 없는 것뿐일까.

쇼타는 린이 뒤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동생한테는 시키지 마라." 할아버지의 한 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쇼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몇 번이고 씁쓸한 무언가가 올라 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두 이름을 갖고 있었다.


딱히 누군가를 죽이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몰래몰래 살아가는 인생이라니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앞서 걸어가는 쇼타와 린은 이제 완전히 오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참 빨리. 노부요는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쓰에가 노부요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선택받은 건가…… 우리가."

두 사람은 가볍게 웃었다.

"보통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법인데."

"근데…… 자기가 고르는 편이 강력하지 않겠어?"

"뭐가?"

하쓰에가 질문을 돌려 주었다.

"뭐랄까…… 유대 말이야. 정 같은거"

노부요는 일부러 반농담조로 대꾸했다. 꽤 직설적인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입 밖에 내자니 어쩐지 쑥쓰러웠다.

쇼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상처주는 상대를 감싼다면 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눈앞의 아이에게도 그 엄정함을 가르쳐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 아닐까. 쇼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솔직히 분석이란 것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가끔 나중에 생각해보면 거의 틀렸더군요(웃음). 분석에 적용하는 팩터가 하나라도 많거나 적으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져 버리죠. 그렇게 재미없는 오류는 더이상 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네, 문장. 제게는 문장이 전부입니다.

물론 소설에는 이야기적 장치, 등장인물, 구조 등 여러 오소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문장으로 귀결합니다. 문장이 바뀌면, 새로워지면, 혹은 진화하면 설령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되풀이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이에 대해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시인이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평생 대여섯 가지밖에 없어. 우린 그걸 다른 형태로 반복할 뿐이지." 듣고 보면 정말 그렇다 싶어요. 결국 우리는 대여섯 가지 패턴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다만 몇 년 단위로 반복하는 사이 형태나 질은 점점 변해가죠. 넓이와 깊이도 달라지고요.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의미 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제 생각에, 한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우리 인생에는 도중에 여러 번 갈림길이 나오잖아요.

어느 쪽으로 갈지 선택해야 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이쪽으로 갔지만 혹시 저쪽으로 갔더라면 지금 이렇게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적 존재로서의 내가 존재하죠. 그것이 소설 주인공에 투영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하곤 해요.

문체는 점점 변화합니다.

작가가 살아 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 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아무리 훌륭한 서퍼도 좋은 파도가 오지 않으면 할 수 없어요.

바로 지금이다, 라는 적절한 포인트를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머리로 해석할 수 있는 건 글로 써봐야 별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는 해석이 불가능하니까 이야기인 거죠.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면서 작가가 일일이 포장을 풀어헤치면 재미고 뭐고 없어요. 독자는 맥이 빠질 테고요. 작가조차 잘 몰라야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의미가 자유롭게 부풀어나간다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말투, 소설로 말하면 문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신뢰감과 친밀감을 낳는 건 말투예요. 말투나 문체에 흡입력이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죠. 물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말투에 매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귀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그건 결국 '고쳐 쓰기'예요.

처음에 일단 완성해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치고, 갈고 닦고,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손대는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만의 리듬, 잘 울리는 보이스를 찾아가죠. 눈보다는 주로 귀를 사용하며 고칩니다.

요는 스스로를 믿는 일이죠.

소설을 쓴다기 보다, 부엌에서 굴튀김을 하나하나 튀기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그러니까 인터뷰든 에세이든, 단편이든 장편이든 제가 글을 쓰는 원리는 모두 같습니다.

보이스를 한층 리얼하게 만들기, 그게 우리 소설가의 중요한 일이죠. 저는 이걸 '매직 터치'라고 불러요. 만지는 것이 전부 황금이 되는 미다스왕 이야기 있죠? 마찬가지예요. 많건 적건 이 '매직 터치'가 없으면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읽어줄 만한 문장을 쓰지 못해요. 물론 작가라면 제각기 다른 '매직 터치'를 가지고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