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가 내가 헛간을 태우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집어 넣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넣듯이 그것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날아빠진 헛간이었으니까.

그것은 확실히 그가 말한 대로,

누군가 태워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관념으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동시 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하는 내가 있고, 그 생각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전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인간의 행동양식 같은 데 흥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소설가란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즐긴다는 말이 좀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될까요. 그래서 얘기한 겁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고요."

나는 느닷없이 초등학교 학예외 때 한 연극이 생각났다.

나는 거기서 장갑파는 아저씨 역을 맡았다. 새끼 여우에게 장갑을 파는 아저씨 역할이다. 그러나 새끼 여우가 가져온 돈으로는 장갑을 살 수 없었다.

"아냐, 안 돼. 돈을 모아서 다시 와. 그러면"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 뿐이에요."

그녀는 말하자면 그런 단순함에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작용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우주의 구조 자체가 뒤집혀버린다.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정 장소, 어떤 특정 시기뿐이다. 무치 '귤껍질 까기'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