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는 앤이 그 말을 믿든지 말든지 자신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웠으니, 지금껏 그가 한 가장 비열한 거짓말이자 가장 비열한 행동인 것 같았다. 브루노 조차도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고, 그처럼 몰아세우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가이는 다소 조바심을 내는 듯한 태도로 뒤돌아섰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아이러니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다는 이유 말고는 그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이러니하다는 것 말고는 낯선 사람을 위해 호텔 방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오언 마크맨과의 약속이 더 급했다.

그러면 가이는 자신이 달라질 것 같았다. 혹은 오래되고 낡은 코트를 벗는 것 같으리라. 가이는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가이는 그렇게 느닷없이, 그렇게 고요하게, 그렇게 격렬하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은 브루노가 부러웠다.

그리고 브루노가 매사에 늘 그랬듯이 쉽게 떠난 것도 부러웠다. 전율이 온몸을 지나갔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안락의자에 앉은 그의 몸은 첫 번째 새벽처럼 단단하게 굳어 긴장했다.

가이는 침실로 가서 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그녀는 잠시 투정을 부렸지만 이내 두 팔로 그를 껴안았다. 그는 앤이 덮은 부드러운 시트에 얼굴을 붇었다. 그들 주변에 사나운 폭풍이 몰아치는데 앤만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것 같았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는 세상이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유일한 신호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옷을 벗었다.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하는 건 정말이지 쉬웠다.

하지만 그의 발과 몸통과 머릿속이 덩굴손으로 휘감기는 것 같았다. 그는 어느날 잘못된 것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앤을 잃게될 운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담뱃불을 붙이고 그녀는 돛대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던 순간, 그는 벌써 그녀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을 좋아해.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가이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브루노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브루노는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가이가 브루노에게 좋아한다는 말 대신 미워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이유를 브루노는 좋아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는 왜 여기 브루노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걸까?

브루노와 싸우고 싶었고 흐느껴 울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 욕지기는 어느새 수그러들고 연민이 밀려왔다. 브루노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브루노는 어쩔 줄 모르고 너무 맹목적이라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비극적으로 보였다.

가이는 앤 옆에 서 있었고, 브루노는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지금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잠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처럼 함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브루노와 그와 앤. 그 행로는 계속될 것이고,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 지속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받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벌이 어디 있을까?

가이는 책상으로 가서 권총을 보았다.

단단한 느낌이 손끝에 닿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가 버리지 않은 유일한 단서였고, 경찰이 그를 찾아낸다면 유일하게 필요한 단서였다. 가이는 자신이 그 권총을 왜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살인을 저지른 그것은 바로 그의 것, 그의 일부, 제3의 손이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 때 그 권총을 샀던 사람도 그였고, 미리엄을 사랑한 사람도 그였고, 시카고에 살 때 방에 그 권총을 보관하면서 마음 깊이 무척 만족한 사람도 그였다. 그 권총은 기계적이고 완벽한 논리를 가진 그의 최고의 모습이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아침식사 차려줄까?"

화를 억누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를 완전히 용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술집에서 싸운 일은 용서하겠지만, 금요일 밤에 일어난 일은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은 이미 너무 깊게 묻혀버려서, 그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죄의식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는데, 브루노의 의지 때문에 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보다 미리엄이 죽었을 때 더 죄책감이 들었던 이유는 뭘까?

그는 얼굴과 손이 마치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객관적으로 대했다.

거울에 비친 눈을 볼 때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곧바로 피해버렸다. 브루노를 열차에서 처음 만났던 때에도 그렇게 눈빛을 피하려 애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자 오른손은 자동적으로 외투 호주머니에 든 권총으로 향했다.

가이는 위험하지도 않고 취약한 점도 없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예전에 그곳에 여러 차례 와서 그를 여러 차례 죽였고, 이번은 그 여러 번 가운데 한 번일 뿐인 것 같았다.

앤은 냉담하게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가이, 한 가지만 말할게. 매사에 최악의 상황이 닥칠 거라고 생각하는거 제발 그만둬."

일단 마음이 그런 생각에 미치자 다시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사람을 죽이는 연기를 했고 그러자 마약을 한 것처럼 마음이 가라 앉았다. 가이가 브루노 생각을 떨치기 위해 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연기였고, 점점 더 커지는 악의적인 생각을 칼처럼 베어내는 몸짓이었다. 밤이 되면 브루노의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물체였고, 가이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힘이었다. 방 안에 루거 권총을 두고 살인을 연기하고 브루노를 따라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상상을 하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브루노가 오늘 나한테 뭘 보내왔는지 알아? 바로 총이야'

그 말을 꺼내지도 못한 가이는 브루노와 연결된 삶이 자신과 앤과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가이가 플랫폼 계단을 내려가던 중, 역사 출입문 옆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앤의 레오파드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본 순간 수줍게 조바심을 내며 달려오는 모습을, 잠시도 더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돌려 미소 지으며 오는 모습을.

브루노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믿을까?

누가 그런 망상을 받아들일까? 편지와 권총이 마치 연극의 소품처럼, 사실도 아니고 사실일 리도 없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보이는 데 필요한 도구처럼 보였다. 가이는 편지를 불태웠다.

브루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종종 터무니없는 얘기 같아서, 그 전까지 가졌던 확신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브루노가 편지로 범행 사실을 고백했는지 의구심조차 들었다. 하지만 브루노가 그 짓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받아들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