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이 싱긋 미소 짓고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그를 비웃을 때도, 심지어 그녀가 웃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을 때조차 그를 흐뭇하게 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이 나무에 애착이 있는 듯했다.

아마도 이곳에 병원을 개업하면서 같이 심었기 때문일 것이다. 슬슬 꽃이 떨어질 때가 됐는지, 시들어서 갈색으로 변한 꽃잎들이 나무 밑동 주변에 흩어져 있다. 최근에는 나도 형의 기일에나 본가에 오게 되면서, 언제나 백일홍이 떨어질 때쯤 이렇게 거실에서 바라보곤 한다. 어쩌다 다른 계절에 들러서 마당에 백일홍이 피지 않았거나 하면,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기분까지도 든다.

이제 와서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시간과 함께 가라 앉아서, 오히려 흐름을 가로막는다. 잃어버릴 것이 많았던 하루하루 속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언제나 한발 늦는다는 깨달음이다. 체념과도 비슷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요 며칠 두 사람은 단 둘이 산악 지역으로 드라이브를 나가서 내키는 대로 아무 길이나 탔다.

그러다 작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마음에 들어 하룻밤을 묵었다. 잠옷도 칫솔도 없었다. 그날 밤은 시간 속에 고립된 섬이 되어 가슴과 추억 속 어딘가에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됐다. 테레즈는 이게 바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지극히 완벽해서 귀하디 귀한 존재. 대단히 귀해서 이런 행복이 있는지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저 행복하기만 했지만 그 행복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다른 존재,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변모했다. 손에든 커피잔, 저 아래 정원을 빠르게 지나는 고양이, 구름 두 개가 소리 없이 맞부딪히는 모습까지도 테레즈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한 달 전만해도 갑자기 찾아드는 행복이 뭔지 몰랐던 테레즈. 그 여파로 지금 자신의 상태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쾌하기보다 오히려 이따금씩 고통스러웠다. 자신에게만 심각한 흠이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골절된 척추로 걷는 것만큼 겁이 났다. 캐롤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어도 테레즈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말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테레즈는 자신의 반응조차 두렵고 믿을 수 없었다. 남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봐 걱정스러웠다. 캐롤도 이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 나름대로 무언가 찾으려던 것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할 무언가를 도박에서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자신처럼.

연애에서부터 이혼에 이르기까지, 료타와 교코의 생활에는 어떠한 계획이라는 것이 없었다.

거칠기만 한 항해와도 같았다. 유일하게 계획할 수 있었던 일은 이혼뿐이었다. 교코만의 계획이었지만.

앞일은 누구에게나 미지의 영역일세.

지도는 없어. 다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모퉁이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 짐작도 못하지.

나는 평범함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실의 극복은 바쁜 일이나 웃음으로는 절대 성취되지 않아.

앞으로도 내 인생은 당신에 대한 회한과 배덕의 자책감으로 지배되겠지.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다 살아 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그러나 달콤한 시간의 과잉 섭취는 인생을 좀먹는다.

먹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된다. 사치오에게는 이미, 그 정도로 해두는 게 좋다고 옆에서 훈계해주는 어른이 없다.

발을 헛디딘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면 붙잡을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벼랑에서, 누가 어깨를 잡아줘서 겨우 걸음을 멈추는 때도 있는 겁니다. 아, 그러니 나 같은 사람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죠..

심했죠. 너무 심했어요.

왜 우리는 소중한 것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지. 눈에 보이는 신호를 무시하고, 잡았던 손도 놓아버리고. 언제나 기회를 날려버리죠. 왜 이렇게 맨날 헛발을 디디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지. 정말 끔찍합니다.

사치오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

가녀린 그 손을 꼭 잡고 함께 도망친다. 그들만 있으면 자신에게도 도망칠 권리가 생긴다. 살아 있어도 좋은 이유가 생긴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궁상을 떨고 있지는 않아.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형편없는 것도 아니고. 내게도 기회는 있어. 사람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당신의 죽음은 폭력이야. 나는 폭력에 굴하지 않아. 징징 짜면서 구질구질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신페이가 울 때 자신도 그렇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신페이라는 어린아이가 지금의 자신에게,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인간과도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한 건 아직은 자신이 그의 보호자라는 우위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누군가에게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 또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그런 기술을 터득하려 하다니 그건 잘못된 거야.

거부해야지. 그런 걸 정답이라고 하는 곳에 살 필요는 없어. 네가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게 정답이야. 대세가 전부는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쓰무라는 그 위험 분자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아이들에게 애정 비슷한 걸 느끼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래서 가장 위로받는 사람은 엄마 잃은 그 아이들도, 위험 분자 아버지도 아닌 쓰무라 본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을 사랑함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러온 양심에 찔리는 온갖 일들을 꿈처럼 잊을 수 있으니까. 

가능하면 아무도 모르게 지금의 쓰무라 씨의 표정을 찍고 싶다.

쓰무라 씨의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저 납덩이같은, 빛이 없는 눈을.

그들은 지난주까지 몰랐던 걸 이번 주에는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고 있죠.

우리는 그와 반비례하듯이 어느 부분은 쇠퇴하고 급기야 죽음에 가까워지고요. 그들 둘과 지내는 시간에는 똑같은 시간이 절대 없다는 것을, 나는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나쓰코의 세계를 거부했음에도, 나쓰코의 세계가 지닌 밝은 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충실하게 생활했던 나쓰코는 나를 암담하게 했다.

마지막 전철을 놓쳤다.

놓쳤다기보다 1시간 간격으로 시계가 울어댔으니 알면서도 그런 것이다. 혼자서 그 밤길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엉덩이를 들지 못했다. 두 녀석이 잠든 뒤 요이치 씨는 봇물이 터진 듯 유키 씨 얘기를 꺼냈다.

그래, 어차피 별거 아니겠지 하고 우습게 여긴 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다 잃어버리는 거지. 세계의 진화 따위보다는 보이는 걸 제대로 보는 게 사실은 더 어려운 법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