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졸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슬슬 깨워야겠다 싶을 때 적당한 비유를 가져오는 거죠. 문장에는 그런 서프라이즈가 필요해요.

리듬이 죽어버리니까요.

늘 하는 말이지만, 뛰어난 퍼커션 연주자는 가장 중요한 음을 치지 않아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리얼리티는 특징적인 게 아니라 종합적인 겁니다.

그리고 속속 변해가죠. '이건 이러하다'라고 단순하게 고정해서 단언할 수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젠더라는 것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게이, 레즈비언, 성 동일성 장애 등, 젠더에는 각각의 중간적 젠더를 포함한 그러데이션이 있죠.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교체되고요. 제 안에도 여성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라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요. 저는 그런 요소를 모두 활용해야 소설이 활성화된다고 생각해요.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상태를 제시한다.

광고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인 것이다.

케네스 클라크는 자신의 책 누드(The Nude)에서 벌거벗은 몸은 그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인 반면,

누드는 예술의 한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회화의 한 형식이 아니라, 회화가 성취해낸 하나의 보는 방식이다.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 -단하나의 이유- 이다.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복제된 그림들은 모든 다른 정보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전달되기 위해 다른 정보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원작의 의미는 그것이 독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나온다.


결국에는 아무도 듣지 못할 어떤 말을 하는 것, 그건 무용하고 허망하고 어떻게 보면 말이 아닌 말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수는 언제오니, 할머니가 너 좋아하는 조기찌개 해놨는데, 하는 말을 듣다가 그것이 더이상 귀가를 확인하는 말이 될 수 없다는 데 눈물을 흘렸다. 언제, 라는 물음이나 할머니, 너, 조기찌개라는 단어들 모두 지금껏 상수가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그저 은총의 부재만을 가리키는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아주 긴 여름이었다.

9평 원룸에 누워 있으면 매미들이 마치 파도처럼 연이어서 쌔- 하고 울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겨우 고립감을 덜 수 있는.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오로지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

그의 한마디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쉽게 정말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불행해지고 싶지 않으면 그런 작은 행복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제발 아프게 하지 말아요.

사실은 마음대로 날 아프게 하라는 의미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암호로 말하는 법을 몰랐다.

아니, 말하는 방법 자체를 몰랐다. 수화조차 못하는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속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더듬었다. 그게 내 암호의 범위였다.

그날 저녁 일기에 내 마음을 적었다.

당신이 그 곡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고 한 말은 과장이었어요. 내가 진짜 하려는 말은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거였어요. 당신이 반대로 나를 좋아한다고 납득할 만한 행동을 보여 주기를 바랐죠. 잠깐 동안 당신은 정말로 그랬어요.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내 생각이 또 바뀌겠지요.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당혹스러운 거리감이 우리 사이에 밀려왔다.

우리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고 좀 더 열었다가 갑자기 친근하게 느낄만한 모든 것을 홱 잡아채 버렸다.

그날 밤, 아키네바가 아마 자신들의 계획을 감행하고 있을 무렵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부칠 편지를 썼다.

보낼 곳은 예의 왼쪽 팔에 쓴 주소였다.
만약 야스요가 말한 대로 국도가 되어 있다면 절대로 배달될 리가 없다. 어디에도 갈 곳 없는 편지. 어디에도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이 세상에 없는 그에게 부치는 편지니까.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이것이 편지의 전문이었다. 많이 생각하며 몇 장이고 편지지를 뭉쳐버린 끝에 쓴 편지가 겨우 이것뿐이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짧은 것이 깨끗해서 히로코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분명 그도 마음에 들어할 거야.)

가끔은 그가 내가 헛간을 태우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집어 넣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넣듯이 그것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날아빠진 헛간이었으니까.

그것은 확실히 그가 말한 대로,

누군가 태워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관념으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동시 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하는 내가 있고, 그 생각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전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인간의 행동양식 같은 데 흥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소설가란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즐긴다는 말이 좀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될까요. 그래서 얘기한 겁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고요."